들어가기에 앞서
1549년, 프란시스코 하비에르(Francisco de Xavier)가 일본에 전한 그리스도교는 전국시대라는 대혼란 속에서 무역과 결합된 형태로 급속도로 전파되어 불과 64년 만에 무려 35만 명의 신자를 보유한 종교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금교령 을 선포하자 상황은 완전히 뒤바뀝니다.
혹독한 탄압과 지도자의 부재라는 가혹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잠복’이라는(숨어버리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특히 고토(五島) 열도는 감시의 눈이 잘 닿지 않는 섬이었기에 많은 ‘잠복 기리시탄’들이 새로운 터전을 찾아 이주한 곳입니다. 그들은 독자적인 공동체를 만들고 은밀하게 신앙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 후 25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 1865년, 나가사키(長崎)의 오우라(大浦) 천주당(天主堂, 오늘날의 성당)에서 ‘신도 발견 '이라고 불리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는 고토시 등 전국 각지의 ‘잠복 기리시탄’들이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지켜냈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러나 이 신앙 고백은 고토시에서 발생한 ‘로야노사코 (牢屋の窄) 사건'의 도화선이 됩니다. 이 사건은 일본에서 마지막으로 일어난 가장 혹독한 그리스도교 탄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기사에서는 그리스도교가 일본에 전해진 후부터 금교와 탄압, 신앙의 자유를 쟁취하기까지의 역사를 고토시에서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일본에 전해진 그리스도교의 발자취와 남만 무역
그리스도교는 5세기에 육로를 통해 중국에 전파되었지만 당시에는 일본까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이후 이슬람 세력이 확장되어 유럽과 아시아의 교류가 어려워지면서 오랜 기간 동안 일본으로는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지 않았습니다.
일본에 그리스도교가 전해진 것은 대항해시대에 포르투갈의 국왕 주앙 3세(João III)의 요청으로 아시아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던 예수회의 프란시스코 하비에르가 1549년 현재의 가고시마(鹿児島)에 도착하여 그리스도교 선교를 시작한 것이 시초입니다. 그렇다면 왜 자비에르는 일본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러 왔을까요? 계기는 1543년 포르투갈인이 총포와 함께 가고시마에 표착했던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일본은 전국시대라 불리는 혼란기였습니다. 포르투갈인이 가져온 총포는 일본 내에서 양산되었고 전쟁의 양상을 완전히 바꿔 놓았습니다. 한편, 총포의 국산화는 실현되었지만 화약 제조에 필요한 초석(질산포타슘)은 일본에서 구할 수 없었을뿐만 아니라 탄환의 재료인 납 역시 일본 내에서는 일부의 광산에서만 채굴되었기 때문에 해외에서 수입해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활약한 이가 바로 포르투갈의 상인들이었습니다. 총포를 전해주며 시작된 포르투갈과 일본의 교류는 이후 그리스도교의 전파로도 이어집니다. 현재의 말레이시아에서 그리스도교 선교 활동을 하던 선교사 프란시스코 하비에르는 포르투갈 상인에게 소개받은 일본인에게 일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관심을 가지고, 가고시마에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포르투갈 왕이 요청한 선교사의 그리스도교 선교 활동은 포르투갈 상인들과 협력하여 일본 내에 그리스도교를 퍼뜨렸습니다. 특히 포르투갈 상인과 초석, 납을 거래하던 규슈 지방의 다이묘들은 스스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했고, 이들을 통해 가신과 영지 주민에게도 선교하여 그 결과 많은 주민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나가사키현 히라도(平戸)의 다이묘였던 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는 1563년에 일본 최초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다이묘로 유명합니다. 그는 포르투갈 상인과 선교사를 위해 당시 외진 항구 마을을 나가사키항으로 새롭게 정비하고 제공하여 보호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566년, 고토 열도를 지배하던 다이묘 우쿠 스미사다(宇久純定)는 포르투갈인 선교사에게 치료받은 것을 계기로 섬에서의 선교를 허락하고 교회를 지원했습니다. 1606년에는 고토 열도에 2,300명 이상의 그리스도교 신자와 교회가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많은 다이묘들이 다투던 전국시대에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그리스도교를 보호하고 상인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여, 다른 다이묘들보다 좋은 조건으로 초석과 납, 최신 무기 등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포르투갈 상인 뿐만 아니라 스페인 상인과도 거래를 하게 됩니다. 스페인 상인 역시 포르투갈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선교와 무역을 함께 추진했습니다. 그 결과 규슈 지방을 중심으로 그리스도교 신자를 보호하고 교회를 세우겠다는, 또한 상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많은 토지를 포르투갈과 스페인에게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58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일본을 통일하면서 상황은 급변하게 됩니다. 전쟁에 사용할 초석과 납의 중요성이 점차 줄어들었던 것입니다. 그때부터 그리스도교를 보호하려는 움직임 또한 점차 약해졌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왜 금지되었을까? 그리스도교 탄압과 금교 정책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후 천하를 차지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관리하는, 즉 자신들이 관리하지 못하는 지역과 사람들이 늘어나는 상황에 심각한 위기감을 느끼고 해결에 나섰습니다. 주요 무역 국가를 포르투갈과 스페인 등 카톨릭 국가에서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로 전환한 것입니다. 네덜란드는 무역과 종교를 분리하고, 도쿠가와 막부에게 선교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 1613년, 도쿠가와 막부는 일본 전국에 그리스도교를 금지하는 칙령인 ‘금교령’을 내리고 그 내용이 기재된 팻말을 전국에 설치했습니다. 교회는 파괴되었고 이듬해인 1614년에는 외국인 선교사, 그리스도교 신앙을 버리지 않은 다이묘와 가신들을 국외로 추방하는 등 구체적인 행동에 나섰습니다. 1616년에는 무역이 가능한 항구를 나가사키와 히라도 두 곳으로 제한하였으며 이를 기점으로 그리스도교 금지와 개종을 더욱 철저히 시행했습니다. 그리고 1624년에는 스페인 선박의 입항을 전면 금지하고 더 이상 스페인과 무역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금지하고, 신자가 발견되면 철저히 개종시켰으며 만약 거부하면 혹독하게 탄압하는 일이 일상적으로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두 항구 이외의 지역에서는 그리스도교 신자를 근절하겠다는 움직임은 그다지 활발하지는 않았습니다. 막부의 관리가 주민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그려진 그림을 밟게 하고, 밟지 않는 경우에는 그리스도교 신자로 간주해 개종을 강요하는 ‘에후미(絵踏, ‘후미에[踏み絵]’ 라고도 함)’를 실시하거나 관리가 마을을 돌며 그리스도교를 믿는지 여부를 조사하는 정도에 그쳤으며, 주민 간 상호 감시나 밀고 제도는 일부 지역에서만 시행되었을 뿐 전국적으로는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포르투갈 상인에게 나가사키 데지마(出島)에서만 무역을 하도록 제한한 바로 다음 해인 1637년, 나가사키현 남서부에서 그리스도교 신자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무장 봉기 ‘시마바라의 난 (島原の乱)'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버려져 있던 시마바라 반도 남단의 하라(原城) 성에서 3만 7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농성하며 약 4개월에 걸쳐 막부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도쿠가와 막부는 이 난의 배후에 포르투갈 상인이 있다고 여겨 포르투갈 선박의 입항을 전면 금지하고, 통상국을 네덜란드만으로 제한하게 됩니다. 시마바라의 난 이후에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철저한 금교 정책을 시행하여 일본 국내에 있는 그리스도교 신자를 뿌리뽑으려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려진 그림을 밟게 하여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님을 증명하는 ‘에후미’나 관리의 마을 순회는 물론, 다섯 가구를 한 조로 짜서 상호 감시하는 ‘고닌구미(五人組)' 실시, 그리스도교 신자나 선교사를 발견하여 밀고하는 자에게 상을 내리는 포상금 제도 등 그리스도교 신자를 효율적으로 찾아내는 제도를 잇달아 발령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모든 국민을 반드시 불교 사찰에 소속시키는 ‘슈몬아라타메 (宗門改)'라는 제도를 고안했습니다. 불교 사찰은 소속된 주민인 단카 (檀家)에게 증명서를 발급하여 관리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족이 사망하면 불교식 장례를 치르게 했습니다. 불교 신자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잠복 키리스탄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시마바라의 난으로부터 7년이 지난 1644년,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고니시 만쇼 (小西マンショ) 신부가 체포되어 처형당하면서, 일본에서는 정식으로 서품받은 가톨릭 신부가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고니시 만쇼 신부는 그리스도교가 금지된 후 이듬해인 1614년 그리스도교 개종을 거부해 해외로 추방된 그리스도교 신자 중 한 명이며, 가족과 함께 마카오로 추방된 후 홀로 로마로 건너가 예수회에 입회하여 사제가 된 인물로 1632년 이후 일본에 돌아와 선교 활동을 한 마지막 신부가 되었습니다. 그의 순교로 일본 국내에는 정통 가톨릭 교리를 가르칠 성직자가 사라졌고, 이후 200년 이상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지도자 없이 은밀하게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1549년 프란시스코 하비에르에 의해 전해진 그리스도교는 1613년의 ‘금교령'으로 불과 64년 만에 선교가 금지됩니다. 전쟁과 무역이 결합되어 단기간에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그리스도교 신자는 전성기에는 35만 명에 이르렀으며 이는 당시 일본 인구의 2% 이상을 차지하는 규모였다고 전해집니다. 이는 현대 일본의 그리스도교 신자 비율인 1% 보다도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금교령을 비롯해 시마바라의 난을 계기로 시행된 철저한 그리스도교 금지와 상호 감시 제도로 인해 그 후 일본 국내에서 그리스도교 신자가 발견되는 사례는 점차 줄어들게 됩니다. 또한 도쿠가와 막부와 이를 계승한 메이지 정부는 ‘일본에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단 한 명도 없다'는 전제 하에 외국을 상대해 왔습니다. 실제로 대다수의 일본인도 에도 시대 초기에는 그리스도교가 근절되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만큼 도쿠가와 막부의 그리스도교 금지 정책은 철저했으며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가르칠 인재(신부)가 없는 상황에서 ‘세례'나 '미사’와 같은 종교적 의식은 존속할 수 없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기적의 「신도 발견」과 고토로의 여정
그리스도교가 금지된 지 약 250년이 지난 1858년, 도쿠가와 막부는 미국,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의 5개국과 새로운 무역 협정을 체결했습니다. 요코하마(横浜), 나가사키, 하코다테(函館), 니가타(新潟), 고베(神戸) 등 국내의 항구가 개방되었고, 외국인 거류지라 불리는 특정 지역 내에서는 일본 법이 아닌 자국의 법이 적용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나가사키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위한 교회로 1864년에 오우라 천주당이 완공됩니다. 당시로서는 매우 보기 드문 서양 건축물인 이 성당은 주변 일본인들 사이에서 ‘프랑스 사원'이나 ‘남만 사원'이라 불리며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오우라 천주당을 맡고 있던 프랑스인 선교사 베르나르 프티장(Bernard-Thadée Petitjean) 신부는 일본인의 교회 견학을 허락했습니다. 그것은 250년 전부터 그리스도교를 금지한 일본이지만 지금도 어딘가에서 숨어서 신앙을 이어가고 있는 신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기적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적은 1865년 3월 17일에 찾아왔습니다. 교회를 찾은 십여 명의 일본인들이 프티장 신부에게 자신들이 그리스도교 신자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는 1613년부터 시작된 그리스도교 신자 근절을 위한 탄압과 철저한 사회 제도 속에서, 나아가 1644년에 이미 선교사나 성직자가 일본 국내에서 남지 않게 된 상황 속에서, 오로지 신자들만의 힘으로 250년 이상 신앙을 대대로 계승해 왔다는 의미입니다. 역사학이나 인구학에서는 부모가 자식을 출산하는 시기의 평균값을 25년으로 보아, 일반적으로 25년마다 한 세대를 나아간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1613년에 태어난 아이를 1세대로 할 경우 10세대(11대손)에 걸쳐 신앙이 이어졌다는 뜻입니다. 발각되면 잔인한 고문이나 죽임을 당할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었으며, 더욱이 그리스도교를 가르치고 인도할 성직자가 없는 상황에서 10세대나 걸쳐 끊어지지 않고 신앙이 이어졌다는 것은 기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적같은 일은 실제로 일어났고, 프티장 신부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오우라 천주당이 있는 나가사키 항은, 원래 일본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다이묘로 유명한 오무라 스미타다의 영지였습니다. 오무라 가문은 가신과 주민을 적극적으로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해 신자가 많았습니다. 또 오무라 다이묘 자신은 신실한 그리스도교 신자로 1580년 나가사키 항을 새롭게 정비하여 그리스도교 신자와 상인에게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통치할 수 없는 지역이 생겨난 것이 문제가 되어, 나가사키는 오무라 가문의 관할에서 제외되게 됩니다. 도쿠가와 막부 직할로 나가사키 부교쇼 (奉行所)가 설치되고, 부교소의 감시 아래에서 오직 네덜란드와의 무역만 허용되었습니다. 한편 나가사키를 제외한 주변 지역은 계속해서 ‘오무라 가문'의 영지로 인정받아 오무라번(大村藩)이 세워지게 됩니다. 오무라번에는 원래 그리스도교 신자가 많았다는 역사적 배경도 있어 숨어서 그리스도교를 믿는 주민이 많았습니다. 금교령이 내려진 지 44년,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난 지 20년이 지난 1657년에는 오무라번 성 근처 여러 마을에서 그리스도교 신자가 다수 적발됩니다. 그 수는 608명에 달했으며 그 중 411명이 처형되는 대형 사건이었습니다. 더욱이 이를 적발한 것은 오무라번이 아닌 나가사키에 거점을 둔 도쿠가와 막부 직할의 나가사키 부교쇼였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오무라번의 중심지인 오무라성 주변의 ‘잠복 기리시탄’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같은 오무라번의 성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는 여전히 숨어서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서쪽 끝(중국 대륙 쪽)의 바다를 끼고 있는 소토메(外海) 지역에는 잠복 기리시탄이 많이 숨어 있었습니다. 소토메 지역은 해안을 따라 깎아지른 절벽이 이어지고 육지 역시 급경사가 많은데, 곳곳에 위치한 계곡에 형성된 작은 마을에서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가 허용되었던 전국시대에도 그리스도교를 가르치는 선교사나 신부가 일상적으로 방문하기 어려운 지역이었기에 당시부터 스스로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있도록 마을마다 공동체를 만들어 운영했습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의식인 세례 의식을 조직적으로 행하고 그 방식을 다음 세대가 계승하거나, 크리스마스와 성인의 축일 등 그리스도교 행사를 기록한 달력을 계승하는 등, 선교사나 신부가 없어도 신앙을 이어갈 수 있는 체제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또한 금교령이 발령된 후로는 매일 기도 등을 할 때 겉보기에는 일본의 전통 종교처럼 보이도록 신경쓰거나, 종교 관련 도구나 마리아 상 대신 흔한 일상용품을 사용하는 등 신앙을 위장함으로써 신앙생활을 안정적으로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을 확립해 나갔습니다. 통치하고 있던 오무라번 역시 잠복 기리시탄의 존재에 대해 어렴풋이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이 지역은 찾아가는 것조차 어려운 곳이었으며 가더라도 적발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이었습니다. 하지만 대규모 잠복 기리시탄이 나가사키 부교쇼에게 또다시 적발될 경우에는 오무라번의 존속 자체가 위태로워질 우려 역시 있어 곤란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바다 너머 고토 열도를 통치하는 고토번(五島藩)에서 농민 이주에 관한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당시 고토번은 인구가 적어 섬을 개척하고 싶어도 경작민이 부족해 진행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반면 오무라번 중에서도 고토 열도와 가깝고 이주가 용이한 소토메 지역은, 인구가 지나치게 증가해 식량 문제가 대두되는 지역이었습니다. 게다가 많은 잠복 기리시탄이 거주하는 지역이기도 하여, 소토메 지역 주민들을 고토 열도로 이주시킬 생각을 하게 됩니다. 소토메 지역의 주민들 역시 오무라번의 그리스도교 단속이 점점 심해지는 것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고토번이 오무라번보다 그리스도교 단속이 덜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1796년부터 1799년까지 오무라번에서 약 3,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고토 열도로 이주하게 됩니다. 이주민의 대부분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향을 떠난 잠복 기리시탄들이었습니다.

고토 열도로 이주할 때 소토메 지역의 잠복 기리시탄들은 자신들의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이주 지역과 종교적 타협점을 고려해 이주 지역을 선택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리스도교가 허용되던 전국시대에는 고토번 번주도 그리스도교 신자였으며 섬 내에는 2,300명이 넘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있었지만, 1613년 금교령 이후 도쿠가와 막부의 정책에 따라 그리스도교 신자가 없는 섬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잠복 기리시탄 마을의 사례로, 세계유산 ‘나가사키와 아마쿠사(天草) 지방의 잠복 기리시탄 관련 유산’을 구성하는 12개 중 하나인 ‘히사카지마(久賀島) 섬의 취락 ’은 기존 불교 신자 마을 주변에 잠복 기리시탄들이 만든 마을입니다. 이곳은 농업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불교 신자 마을의 농사일 혹은 어업을 돕거나, 논을 빌리는 등 이주 지역의 불교 신자 마을 주민과 상호관계를 구축하며 생활하는 동시에, 숨어서 신앙생활도 이어갔습니다. 또한 같은 섬의 고린(五輪) 지구처럼 기존 마을과 완전히 격리되어 교류 없이 생활하며 신앙을 이어온 마을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계유산인 ‘나루시마(奈留島) 섬의 에가미(江上) 취락 ’ 역시 섬 내의 기존 불교 신자 마을과 격리된, 산으로 둘러싸인 계곡의 작은 후미 쪽 좁은 평지에 머무르며 작게나마 평지를 개간하고 경사면을 깎아 집을 지어 마을을 만들었습니다. 후쿠에지마(福江島) 섬의 한토마리(半泊) 마을도 같은 유형의 마을입니다. 다른 지역과 격리된 이 마을은 지금도 들어가는 길이 매우 좁아서 이 길 끝에 정말로 마을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지금이야 차로 이동할 수 있지만 차가 없던 당시에는 얼마나 교류가 어려웠을지, 그리고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숨어 지내며 얼마나 고된 생활을 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여러 세대에 걸쳐 신앙을 지켜온 것입니다.


마지막 탄압 그리고 신앙의 자유를 향해: 고토 기리시탄의 고난과 기쁨
그렇게 숨어 지내던 잠복 기리시탄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전해집니다. 1864년에 오우라 천주당이 완공된 것입니다. 게다가 원래 거류지에 거주하는 외국인만 이용할 수 있는 이 시설에서 일본인의 천주당 견학을 허용한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습니다. 고토시 등 여러 지역에서 잠복 기리시탄의 대표자들이 오우라 천주당을 찾아가, 프티장 신부를 만나 자신들이 잠복 기리시탄이라는 사실을 알린 것입니다. 그들은 신부에게 가르침을 받고 마을로 돌아가 그 가르침을 전파했습니다. 그렇게 잠복 기리시탄들이 점차 자신의 신앙을 공개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장례식은 불교식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교리에 따라 치르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외국인을 받아들이며 개국을 목전에 두고 있었기에 그리스도교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는 묵인해 왔던 도쿠가와 막부도, 이를 더 이상 좌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다시금 그리스도교 신자에 대한 혹독한 탄압이 시작되었습니다. 1867년, 나가사키현 우라카미(浦上) 지역에서는 3,300명 이상의 그리스도교 신자가 체포되었고, 전국 각지로 이송되어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 결과 662명의 소중한 생명이 희생되었습니다. 고토시에서도 1868년에 세계유산인 ‘히사카지마 섬의 취락’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임을 인정한 200명이 고작 12조(12畳, 다다미 12장 넓이: 19.44m²) 크기의 감방에 8개월간 갇혀 고문을 당하며 개종을 강요받았습니다. 다다미 12장은 대략 가로세로4m × 5m의 공간입니다. 일본 주택의 거실이나 호텔의 더블룸 혹은 트윈룸 정도 크기의 감방에 200명을 수용했던 것입니다. 화장실도 없는 흙 바닥 감옥에서 사람들은 벽에 달라붙어서 간신히 공간을 만들어 교대로 앉아서 쉬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렇게 이 고문으로 42명의 소중한 생명을 잃고 말았습니다. 일본에 체류 중이던 외국인 영사나 공사, 선교사들은 이 사건을 전해 듣고 강력히 항의했으며 관련 내용을 본국에도 전달했습니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엄격한 단속이 재개된 지 4년이 지난 1871년,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정권을 이양받은 메이지 정부는 외국과 체결한 조약의 재검토와 기술 제공 등을 위해 외국으로 ‘이와쿠라(岩倉) 사절단 ’을 파견했는데, 사절단이 만난 미국 남북전쟁의 영웅이자 대통령인 율리시스 S. 그랜트(Ulysses S. Grant), 대영제국의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 덴마크의 국왕 크리스티안 9세(Christian IX) 등은 그리스도교 탄압을 강하게 비난했으며, 막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조약 개정 등은 도저히 진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마침내 1873년, 그리스도교를 금지한다는 내용이 기재된 고사쓰(高札, 널리 알리는 글을 써서 붙이던 팻말)가 전국에서 철거됩니다. 이는 1613년에 그리스도교가 금지된 지 260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신앙을 인정받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교회(천주당)의 설립이었습니다. 외국인 선교사들의 지도 아래 나가사키현 내에 많은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는 일본에서 그리스도교 선교가 허용되었다는 증거이자 상징적인 건축물이었습니다. 고토시에도 1880년 프랑스인 선교사의 지도로 도자키(堂崎)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처음에는 목조 건축물이었지만 1908년에 벽돌로 다시 세워졌습니다. 이러한 교회는 대부분 지역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지었습니다. 세계유산인 ‘나루시마 섬의 에가미 취락’에 있는 에가미 천주당은 40~50여 세대의 신자들이 모여 지인망(地引網)으로 샛줄멸(청어과의 물고기로 꽃멸치 혹은 꽃멸이라고도 불림)을 잡아 그 돈으로 지었습니다. 크림색 외벽과 하늘색 창틀이 특징인 작고 소박한 목조 건물 교회입니다. 당시 스테인드글라스는 너무 비싸서 설치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신 신자들이 투명한 유리에 직접 그림을 그려 장식했습니다.

잠복 기리시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행: 고토 열도의 교회 순례
현재 고토시에 있는 교회는, 260년 동안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지 못하고 숨어서 신앙생활을 이어온 사람들이 자유를 얻은 기쁨인 동시에 그때까지의 슬픔과 고뇌의 결정체입니다. 세계유산인 ‘히사카지마 섬’에서 일어난 12조 감옥에서의 고문이 있었던 자리에도 지금은 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히사카지마 섬의 만이 내려다보이는 고지대에 세워진 아주 작고 소박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실제로 그 교회 앞에 서서 잠복 기리시탄의 역사를 떠올렸을 때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왜 히사카지마 섬에 잠복 기리시탄들이 있었는지, 고토시에 세워진 많은 교회들을 옛사람들은 어떤 심정으로 기부하고 지은 것인지.
나가사키현 고토시에서, 260년간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온 순례의 발자취를 짚어 보시는 건 어떨까요? 놀라운 경험을 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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